[국민일보] 한국음악과 김성녀 석좌교수님 기사
배우 김성녀가 지난 12일 석좌교수로 근무중인 서울 중구 동국대 연구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김성녀는 오는 23~24일 서울 강동아트센터에서 대표작인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을 공연한 뒤 29일부터 7월 9일까지는 경기아트센터에서 한태숙 연출 경기도극단의 신작 ‘갈매기’에 출연한다. 최현규 기자
최근 무대에 올리는 작품마다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 있는 국립창극단의 변화는 지난 2012년 시작됐다. 연극, 창극, 마당놀이, 뮤지컬, 영화, 드라마 등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를 해온 배우 김성녀(72)가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면서부터다. “보고 싶은 창극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김성녀는 오랫동안 판소리 다섯 바탕에 머물러 있던 국립창극단의 틀을 깨기 시작했다. 소설, 그리스 비극, 서양 희곡, 경극 등 다양한 소재를 흡수해 외연을 확장하고 국내외 유명 아티스트들을 초빙해 작업함으로써 창극을 동시대 공연예술 장르로 만들었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와 ‘트로이의 여인들’ 같은 레퍼토리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7년간의 예술감독직을 성공적으로 마친 김성녀가 다시 돌아온 곳은 다름 아닌 무대. “여전히 배우가 천직”이라는 김성녀는 지난 2021년 국립극단의 ‘파우스트 엔딩’에서 남성 배우의 전유물이었던 파우스트 역에 한국 여배우로는 처음 도전하는가 하면 지난해엔 원로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햄릿’에서 왕비 거트루드 역을 맡는 등 연기혼을 불태웠다. 올해 상반기에도 부상당한 선배 배우 손숙을 대신해 연극 ‘장수상회’에 출연했다. 지금은 자신의 대표작인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6월 23~24일 서울 강동아트센터)과 경기도극단의 신작 ‘갈매기’(6월 29일~7월 9일 수원 경기아트센터)에 잇따라 출연하는 강행군 중이다. 올해 신설된 동국대 한국음악과의 석좌교수이기도 한 그를 최근 동국대 연구실에서 만나 두 작품의 연습과정에 대해 들었다.
19년째 무대에 오르는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
“‘벽 속의 요정’이 올해 19년째에요. 2005년 초연 이후 매년 공연을 올렸죠. 서울에선 이번에 오랜만에 관객을 만나지만, 그동안 지역 문예회관에서 꾸준히 초청받아 공연했어요. 올해도 쉬지 않고 공연을 이어갈 수 있게 됐네요.”
배우 김성녀의 대표작인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 강동아트센터
여성국극 스타였던 박옥진(1935~2004)과 연출가 김향(1921~1999)의 딸인 김성녀는 어릴 때부터 무대를 놀이터 삼아 자랐다. 성인이 되어 배우로 본격 데뷔한 것은 1976년 손진책이 연출한 음악극 ‘한네의 승천’을 통해서다. 이후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모노드라마는 데뷔 30년 만에 ‘벽 속의 요정’이 처음이다. 박정자, 손숙, 윤석화 등 그와 같은 세대의 여배우들이 진작에 모노드라마로 명성을 얻은 것과 다른 행보다.
“남편(손진책)과 함께 극단 미추를 운영하던 입장에서 저를 위한 모노드라마를 할 수는 없죠. 2005년 송승환씨가 기획 및 제작한 ‘여배우 시리즈’에서 모노드라마를 의뢰한 덕분에 비로소 도전할 수 있었죠. ‘벽 속의 요정’은 원작자인 일본 극작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제게 어울린다며 권했던 작품이었어요.”
일본의 유명 극작가 겸 연출가인 후쿠다가 쓴 ‘벽 속의 요정’은 스페인 내전 당시 실화를 소재로 했다. 좌파였던 아버지가 우파 정권이 들어선 뒤 집의 벽에 숨어 살면서 딸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본다는 내용이다. 한국 공연은 극작가 배삼식의 각색을 통해 6·25 한국전쟁 직전부터 90년대까지 한국적 상황으로 바뀌었다. 또한, 원작이 딸과 아버지의 관계에 초점을 뒀다면 배삼식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를 좀 더 부각했다. 김성녀는 이 작품에서 1인 32역을 소화하는 명연기를 펼치며 전회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초연 당시 ‘올해의 예술상’ ‘동아연극상 연기상’ 등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다.
배우 김성녀는 올 상반기 부상당한 선배 배우 손숙을 대신해 연극 ‘장수상회’에 출연했다. 이 작품에는 이순재, 신구, 박정자 등 원로배우들이 출연했다. 쇼앤텔플레이
“첫 공연에서 잠깐 대사를 까먹었어요. 스태프 상대 리허설 때는 그다지 반응 없었던 장면에서 관객이 폭소를 터뜨리자 머릿속이 하얘지더라고요. 무대에 혼자 있기 때문에 도움받을 수 있는 상대도 없고요. 다행히 관객과 함께 웃으면서 무대를 두 바퀴 도니까 대사가 생각났는데, 그 순간은 정말 지옥 같았어요.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 기립박수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 작품이 내 대표작이 될 거라는 걸 느꼈어요.”
김성녀는 원래 내년 ‘벽 속의 요정’ 20주년 기념 공연을 ‘굿바이 공연’으로 계획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2시간 20분 걸리는 러닝타임 동안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벽 속의 요정’이 음악극이라서 노래가 적지 않은데, 예전만큼 고음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노래의 키를 조금 낮출 수 있도록 작곡가에게 편곡을 부탁했는데, 이번에 원래 키로 부를지 편곡한 대로 부를지 아직은 모르겠다”면서 “하지만 얼마 전에 이순재, 신구, 박정자 등 선배 배우들과 ‘장수상회’에 출연하는 동안 내가 건방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80대 선배 배우들의 연기 열정을 보면서 무대에서 계속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배우가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태숙 연출 ‘갈매기’ 출연은 새로운 도전
실제로 김성녀는 최근 배우로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동안 연기해왔던 것과는 다른 스타일의 작품인 한태숙의 ‘갈매기’에 출연하는 것이다. ‘갈매기’는 동일한 무대에서 두 개의 작품을 차례로 만날 수 있는 경기도극단 정기공연 ‘원 스테이지’ 가운데 하나로 임지민 연출 ‘죽음의배’ 와 함께 공연된다. 한국의 대표 연출가 중 한 명인 한태숙이 오랜만에 직접 쓰고 연출하는 ‘갈매기’는 평생을 무대 위에서 살아온 배우의 이야기를 담았다. 극 중 주인공의 이름도 ‘김성녀’다.
“한태숙 선생이 지난해 전화를 걸어서 나를 위한 작품을 쓰겠다고 하더군요. 배우로서는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죠. 게다가 지난 2014년 함께했던 연극 ‘유리 동물원’의 연습 과정이나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바로 출연하겠다고 했죠.”
한태숙이 쓰고 연출하는 경기도극단의 신작 ‘갈매기’ 연습중인 배우 김성녀. 경기도극단
김성녀와 한태숙은 1950년생 동갑내기다. 두 사람 모두 오랜 시간 연극계를 지키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함께 작업한 것은 2014년 국립극단의 ‘유리 동물원’이 유일하다. 하지만 김성녀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첫 작품으로 2012년 하반기 선보인 한태숙 연출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이 성공한 덕분에 창극 개혁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점에서 둘의 인연은 만만치 않다. 그는 “지금은 돌아가신 평론가 구히서 선생이 ‘유리 동물원’ 공연 당시 한태숙 선생을 창, 나를 방패에 비유했었다. 그만큼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그런 부분이 오히려 작업할 때 잘 맞았던 것 같다”고 밝혔다.
다만 ‘유리 동물원’과 달리 ‘갈매기’는 서사가 일관되고 치밀하게 이뤄진 것이 아니라 파편적으로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홉 ‘갈매기’의 대사가 인용되는가 하면 연극계 관계자라면 알 수 있는 극장 관련 대사들이나 에피소드가 등장하기 때문에 무조건 낯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연출가의 의도를 배우가 관객에게 잘 전달해야 하는데, 지금은 나 자신이 완벽하게 체화시키지 못한 상태에요. 나 자신이 출구를 찾아 미로를 헤매는 신인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70살이 넘어서 이런 새로운 작품을 언제 해보겠나 싶어서 도전의식이 생기기도 해요.”
낯선 스타일의 연극에 출연하는 데서 오는 부담감이 만만치 않지만, 김성녀는 앞으로도 한태숙과의 작업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 함께하고 싶단다. “한태숙 선생은 연극을 죽기 살기로 한다. 연극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드문 사람”이라면서 “한태숙 선생 같은 귀한 동지가 있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고 토로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8365342